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빈센트반 고흐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연재를 통해 빈센트 반 고흐를 되새길 수 있어 행복하다. 1에서 6편까지 올린 것에 이어 7편을 올리며,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아름답고 소중한 자료를 간직하고 싶어 이곳에 포스팅을 한다. 세계여행중 작가들의 박물관과 생가를 꽤나 많이가 보았지만,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는 가보질 못했다. 이원율의후암동 미술관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발자취를 만나보고 싶은 계획을 독자들과 함께 희망하며 이 아름다운 고흐 마을에 대해 미리 공부해 보자.
고흐의 마지막 화혼, 이곳에서 일렁였다
고흐는 1890년 5월 21일 오베르에 왔다. 37살이었다. 평생 4개국에서 38차례 주소를 옮기며 산 그의 마지막 둥지였다. 이곳은 파리와는 적당히 먼, 조용하고 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전원도시였다. 고흐는 오베르를 마음에 쏙 들어했다. 고흐는 자연이 안겨주는 생명력에 들떴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고흐 마을
고흐는 동생 테오와 어머니, 고갱에게 "오베르는 그림을 그리며 지내기 참 좋은 곳이야!" 라는 내용의 편지를 부쳤다. 테오에게 따로 쓴 편지에선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워. 정말로! 여기는 그림처럼 전형적인 전원이 펼쳐진 진정 아름다운 곳이야!"라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기회 오베르
사실, 그 시절 고흐는 잘 몰랐을 수 있지만 그의 주변인은 다 아는 게 있었다. 고흐에게 오베르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고흐가 거장 반열에 드는 건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수년이 흐른 뒤다. 오베르 땅을 막 밟은 그때의 고흐는 가난하고 능력 없는 실패자였다. 이곳에서조차 적응 못하고 스러지면 더는 답도, 희망도 없는 인생의 패배자가 될 터였다. 고흐는 무엇보다 이곳에서 광기를 잠재워야 했다.오베르로 오기 1년 전 고흐가 있던 곳은 생레미 정신병원이
생레미 정신병원을 떠나 온 고흐
사실, 그 시절 고흐는 잘 몰랐을 수 있지만 그의 주변인은 다 아는 게 있었다.고흐에게 오베르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고흐가 거장 반열에 드는 건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수년이 흐른 뒤다. 오베르 땅을 막 밟은 그때의 고흐는 가난하고 능력 없는 실패자였다. 이곳에서조차 적응 못하고 스러지면 더는 답도, 희망도 없는 인생의 패배자가 될 터였다. 고흐는 무엇보다 이곳에서 광기를 잠재워야 했다.오베르로 오기 1년 전 고흐가 있던 곳은 생레미 정신병원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긴 암흑기
1889년 5월 3일에 제 발로 들어간 정신병원에서 고흐는 긴 암흑기를 겪었다. 그만큼 고흐의 상태는 불안했고, 때로는 위험했다. 공황과 발작을 지긋지긋하게 반복했다. 정신병원 담 너머를 즐겨보던 고흐는 종종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를을 떠올렸다. 아를은 고흐가 정신병원에서 통제받기 직전 있던 동네였다. 한때 고흐에게 아를은 이상향이었다.'미친 짓'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일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빈센트 반 고흐 가난과 부적응 공황의 시간들
1888년 2월 20일. 그러니까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1년여 전, 막 30대 중반이 된 고흐는 이날 아를에 도착했다. 넝마 같은 짐가방과 함께였다. 파리의 북적임에 적응할 수 없던 고흐가 기차로 16시간을 달려 온 도시였다. 고흐는 아를의 자연에 경탄했다. 이 마을에서 평생 꽃과 나무만 그리고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아를을 추억하며 소리내 흐느꼈던 고흐
그러나 일이 터졌다.같이 살던 화가 고갱과 다툰 뒤 홧김에 면도칼로 자기 귀를 자른 것이다. 한술 더 떠 그 귀를 거리의 여인에게 선물했다. 프러포즈 반지라도 되는 양 곱게 포장한 채.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는 고흐가 생레미 정신병원을 찾은 직접적인 이유였다. 스스로 정신병원 문을 두드려야 했던 고흐는 창살 너머의 아를을 추억하고 나면 틀림없이 소리 내 흐느꼈다. 그 울음에 병원 직원과 환자 모두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를 감싸줄 곳이 없었던 외톨이 고흐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고흐에게 아를이 아닌 오베르를 권한 이는 테오였다. 당시 오베르는 화가들의 요양지 중 한 곳으로 거론되던 곳이었다. 고흐는 아직 파리를 견딜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고흐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외톨이였고, 매번 실패하는 화가였다. 늘 돈에 쪼들렸다. 그림은 도저히 팔리지 않았다. 조울증과 강박증 등이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통에 주변 사람들도 지쳐 떠나갔다. 사실고흐는 아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였다.'귀 사건' 이후 아를 사람들은 고흐라고 하면 치를 떨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