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3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1, 2편에 이어 3편을 소개한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지금도 행복한 기억 중의 하나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빈센트 반 고흐 박물관에서의 기억이다. 현대적이며 모던한 빈센트 반 고흐의 박물관은 네덜란드를 여행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꼭 찾아가는 곳이다. 그때의 한없이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내가 만났던 인상 깊은 빈센트 반 고흐 박물관의 이야기를 아래에 조금 붙이며,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3편을 올린다.
내가 만난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 박물관에서
강직하게 살라는 의미의 이름 빈센트, 가장 인상깊게 박물관 내부 작품 앞에 오래 서있었던 자리는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작품 앞, 자신의 내면세계와 예술적인 변화를 탐 구하기 위해 그린 자화상들, 그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렸다는 자화상은 어쩌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빈센트 반 고흐의 거울 속 내면의 여러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박물관을 나오면서 한참 동안 나에게 질문으로 남아있던 여운이다.
빈센트 반 고흐 박물관, 꽃피는 아몬드 나무 커피잔 2개의 추억
남프랑스 아를르에 가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1층에 천막이 있는 고흐가 살던 그림속의 노란 집, 고갱을 기다리며 감사를 전하기 위해 그린 노란색의 해바라기까지,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의 작은 커피잔 2개를 기념으로 사들고 아쉬움을 두고, 다음에 다시 와야지 하며 떠나 왔던 곳, 그때의 사진이나 자료들은 이곳에 올리지 않기로 하겠다. 그 이유는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내용을 그대로 간직하며 글과 그림의 흐름을 방해하기 싫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가난한 사랑의 시한부
둘의 찬란한 순간은 길지 않았다. 너무 가난한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가기에 너무 높은 산이었고, 너무 깊은 늪이었다. 별 다른 직업 없는 고흐는 테오가 보내주는 용돈으로만 살고 있었다. 그는 물감도 마음껏 갖지 못했다. 그가 살 수 있는 건 굳은 빵과 식은 우유 따위였다. 시엔과 그녀 가족까지 먹여살리는 건 애초에 힘든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애써 외면했지만, 처음부터 시한부의 관계였다.
시든 나무같은 시엔을 사랑한 고흐
고흐의 부모도 펄쩍 뛰었다. 당장 다 때려치우고 집에 올 것을 명령했다. 고흐는 사랑을 위해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 적도 있는 남자였다. 그런 그는 무조건 버티려는 마음뿐이었다. "돈 없고 몸 아프면 열에 하나는 꼼짝없이 죽는다지만, 시엔과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 길을 택하겠어. (…) 시엔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녀를 사랑해. 나와 그녀는 서로에게 충실하기로 약속했어." "들어가 보니 그녀는 시든 나무처럼 늘어져 있었어.
새순까지 말라버린 나뭇가지 같은 시엔을 사랑한 고흐
차갑고 메마른 바람에 시달려 새순까지 말라버린 나뭇가지 같았어. (나는)절대로 떠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켰어." 이쯤 반 고흐의 글이었다. "단 한 번의 선함을 본 적 없는 그녀가 어떻게 선량해질 수 있겠어?" 그는 시엔의 남루함을 지적하는 말에 대해선 이렇게 따졌다고 한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1883년, 가을. 둘은 갈라섰다. 서로를 만나고 일 년반쯤 흐른 후였다.
고흐의 여인 시엔, 생을 마감하다
고흐가 시엔에게 옮은 성병으로 죽다 살았다는 설, 어머니의 닦달로 몰래 몸을 팔던 시엔이 끝내 고흐에게 걸리고 말았다는 설 등이 있다. 시엔은 결별 후 세탁부로 생을 이어갔다. 1901년, 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3년 뒤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잊은 일을 떠올린 사람처럼 갑자기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로써 가장 찬란했던 때 꺼낸 그 말을 실현한 셈이었다.
슬픔의 바다,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다시 혼자였다. 고흐는 뇌넨에 있는 부모 집으로 왔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짐을 풀었다. 창밖 너머 보이는 언덕에선 풍차가 돌돌 돌고 있었다.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며 뜨내기처럼 정처 없이 걸었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면 곧장 이젤을 세웠다. 그때부터는 햇빛이 살갗을 태우든,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든 상관치 않았다.
처연한 어두움 누에넨의 목사관 정원
그는 화혼에 휩싸인 양 하루에만 한 점 이상의 그림을 완성할 때도 있었다. 고흐는 이 시기에 '누에넨의 목사관 정원'을 그렸다. 그는 침침한 하늘과 거친 땅, 우중충한 빛깔의 나무로 화폭을 가득 채웠다. 검은색 차림새의 여인을 더했지만, 이는 그림에 처연함을 더할 장치일 뿐이었다. 고흐는 몸도, 정신도 지쳐있었다. 그의 허한 마음을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존경한 장 프랑수아 밀레
냉랭했던 가족은 그런 고흐에게 마음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는 핏줄들의 보살핌에 천천히 기운을 되찾는 듯했다. 고흐는 이제 시골의 소박한 장면 그리기에 삶을 바치기로 했다. 그렇게 해 뼛속 깊이 존경하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정신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에게 '감자 먹는 사람들' 은 이러한 선언과도 같았다. 이는 석유램프 불빛 아래 모인 농민 가족의 식사를 담은 그림이었다.
감자먹는 사람들 빈 센트 반 고흐
오늘을 힘껏 살아온 이들이 내일 또한 정직하게 노동하기 위해 감자를 찍어먹는 장면이었다. 그가 보고 느낀 농촌 특유의 애틋하면서도 서글픈 분위기가 꾹 담긴 작품이었다. "진전되고 있어. 지금껏 네가 본 내 그림과는 아주 다른 무언가가 있어. 그 점은 분명해." 이 무렵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였다. 그는 이제야 갈 길을 찾은 듯했다. 착각이었다. 숨죽인 시련은 또 고개를 들었다.
슬픔에 흠뻑 젖은 용기 빈센트 반 고흐
고흐에게 불행은 바다 같았다. 슬픔에 흠뻑 젖은 그는 재차 용기를 내 앞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이상(理想)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썰물처럼 잠깐 빠져나간 슬픔은 밀물처럼 어김없이 다시 밀려왔다. 소금물처럼 짠 고통을 잔뜩 머금은 그가 할 수 있는 건, 어쩔 도리 없이 허우적대는 일뿐이었다. 일이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고흐를 짝사랑한 연상의 여인 베게만
고흐는 열 살 연상의 이웃 여인 마르호트 베게만이 스스로 독극물을 먹은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 이유가 자기 때문이었다는 걸 들었을 때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사연은 이랬다. 베게만은 낭인처럼 떠도는 고흐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순전히 혼자만의 속앓이였다. 사랑꾼 고흐는 이미 다른 대상에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건 예술 그 자체였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어. (…) 무엇보다 그림 안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예술 그 자체에 사랑을 쏟아부은 빈센트 반 고흐
"농민의 삶을 종일 지켜보면, 다른 어떤 일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 빠져들게 돼." 글로 고백했듯, 당장의 그는 농촌 풍경 그리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에게 또 다른 사랑을 할 여유 따위 없었다. 그런데도 베게만이 뜻을 접지 않았다. 그녀는 저 혼자 반 고흐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이 뜻을 양가 부모에게 알리기도 했다.
억울하게 손가락질받은 빈센트 반 고흐
돌아오는 건 시큰둥한 반응밖에 없었다. 베게만에게는 뿌리 깊은 불안증이 있었다. 이 증상은 이어지는 좌절 속에서 살을 찌웠다. 내몰린 그녀가 택한 게 극단적 선택 시도였다. 그녀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이 작은 마을에선 유례없는 대형 스캔들이었다. 이때부터 고흐는 억울하게 손가락질받아야 했다. 사건은 또 터졌다. 이번에는 농가의 한 소녀 였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자꾸 헛구역질을 했다. 배도 차츰 불러왔다. 더는 감출 수가 없던 그녀는 울면서 고백했다.
고흐가 원하는 건 오직 농촌 풍경
혼외임신이었다. 사촌과의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무턱대고 고흐를 문제의 남자로 의심했다. 그가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 적 있다는 이유였다. 고흐는 억울함을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마을 유지(有志)는 만나는 모든 이에게 반 고흐의 모델로 나서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더는 이곳에 있기가 힘들었다. 고흐는 이까지 오면서 모든 걸 포기했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건 오직 농촌 풍경뿐이었으나, 세상은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