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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빈센트 반고흐 5

Viva~La~Vida 2024. 1. 3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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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빈센트 반고흐 1.2.3.4. 에 이어 5편을 이어간다. 위대한 네덜란드 인으로 선정된 불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밤하늘의 별을 사랑한 가난했던 화가,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받은 위로와 행복으로 그를 그리워하며 포스팅한다.

빈센트 반 고흐, 슬픔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생레미의 요양원 안 창가에 기댄 고흐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 시설의 환자이자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 또한 자신의 발작이 더 크게, 더 자주 생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다 붓도 쥘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을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고흐는 종종 시엔과 함께였던 헤이그 시절을 곱씹었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자료,사진-헤럴드 경제. 이원율 기자

 

나는 구제 불능인 건가 생레미 요양원에서의 고흐

당시 고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빈민 구제소를 찾았었다. 거기서 그 남자를 봤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었다. 낡은 작업복을 입고 해진 구두를 신은 볼품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다가서면 끅끅대는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고흐는 이 불쌍한 자가 고통을 넘어선 영원의 세계로 갈 수 있기를 바랐었다. … 내가 지금 그 사람 꼴이군. 현실로 돌아온 고흐는 혼잣말을 했다.

영원의 문 앞에서 , 빈센트 반 고흐

그는 힘없이 붓을 들었다. 8년 전 노인의 모습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두 눈을 가린 채 우는 모습, 털썩 주저앉고선 고개 숙여 절망하는 모습 등 사실상 그의 자화상과 다를 바 없는 작품이었다. 고흐는 제목을 붙였다. 깊은 사색이 담긴 문장 한 줄이었다. 그것은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 "내가 얼마나 더 큰 슬픔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다."이쯤 테오에게 쓴 글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캔버스에 유채, 73x92cm, 뉴욕 현대미술관. 자료,사진-헤럴드경제 이원율 기자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격정적인 내면, 요동치는 마음, 솟구치는 불안감을 품고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그의 심경이 빼곡히 묻어있는 게 이때 완성한 '별이 빛나는 밤'이다. 고흐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 그가 가장 큰 절망에 빠졌을 때 탄생했다.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오베르였다. 그는 어딘가 쫓기는 양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형상을 화폭에 표현했다. 때때로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북받칠 땐 물감을 씹어먹었다.

마르게리트와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과 정신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은 무척 허무했다. 권총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으로 알려졌지만, 이를 놓고서는 말이 분분하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여인이 한 명 또 등장한다. 당시 고흐의 주치의였던 폴 가셰의 딸,마르게리트다. 예술 애호가였던 가셰는 고흐를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불안정한 그를 사윗감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울고있는 노인,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울고 있는 노인(영원의 문에서)', 1890, 캔버스에 유채, 81x65cm, 크뢸러 밀러 미술관

 

허무한 죽음 빈센트 반 고흐

그런데, 고흐와 마르게리타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 고흐는 마르게리타의 초상화를 그린다며 그녀 방을 마음껏 오가고 있었다. 이를 본 가셰는 고흐를 불러 세워 자존심을 건드렸다. 끝내 서로가 정제되지 않은 폭언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고흐가 죽은 것이었다. 고흐가 실연에 대한 충격으로 그런 길을 택한 게 아닐까. 가셰의 가족들은 이렇게 추측했다. 이 밖에 고흐의 단순 실수였다는 설, 동네 불량배의 소행이었다는 설 등도 있다.

빈센트 반 고흐, 37세에 선택한 죽음

그는 옆구리 관통상을 입은 채 여관까지 걸어왔다. 두 평짜리 다락방에서 끙끙대던 그는 이틀 뒤 죽고 말았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이었다. 지역 언론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서른일곱 살 화가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썼다. 이마저도 단신이었다. 고흐는 방랑과 방황의 화가였다. 그의 삶은 늘 서정적이며, 언제나 잠정적이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짐을 푼 장소는 아마 영원의 문이 있는 영원의 세계였으리라.

 

가셰박사의 초상화,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화(1)', 1890, 캔버스에 유채, 67x56cm, 개인소장

 

방랑과 방황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영원으로 떠나다

극복하지 못한 가난과 수많은 슬픔을 간직한 채 그는 영원으로 떠났다. " 나중에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그림을 알아보게 될 것이고,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나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만일 오래 살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확실히 입증해 보일 것이다" 천재적인 그의 정서에 세상은 도와주질 않았다. 방랑과 방황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수많은 위로와 행복을 우리에게 남기고 영원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우리는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방랑과 방황의 화가 빈 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나무 뿌리', 1890, 캔버스에 유채, 50x100cm, 반 고흐 미술관

 

〈참고 자료〉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위즈덤하우스.

반 고흐가 그린 사람들, 랄프 스키, 도서출판 이종.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스톤, 청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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